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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ies

다큐멘터리 Ain't no time for women: 선거날 동네 미용실에서는 무슨일이 있었나

by solim 2024. 10. 8.

손님도 직원도 많고 네이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프랜차이즈 미용실들 말고, 의자 두어 개에 사장님 한 분이 운영하는 작은 '동네' 미용실은 꽤 오래전부터 중년-노년 여성들의 일종의 사랑방, 해우소, 아고라 - 그날그날의 이야깃거리와 분위기에 따라 이름이 달라질 것 - 역할을 했다. 머리 할 일이 없어도 편히 드나들 수 있는, 동네 주민들이 부담 없이 모여 앉아 시시콜콜한 집안사부터 라디오나 텔레비전 뉴스 보도에 한 마디씩 얹는 그곳. 
 
생각해 보면 '엄마'를 지나 '아줌마', '할머니'가 된 여성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공간은 많지 않다. 발언권을 점점 빼앗기거나, 혹은 스스로 놓아버리거나, 아니면 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거나. 소녀가 여성이 되어 사회에 나왔다가, 결혼 및 출산과 동시에 다시 집 안으로 돌아가는 그 전통적인 생애주기를 따르다 보면, 그렇게 된다. 요즘은 자녀가 어리면 엄마들에게 맘카페가 주어지지만, 애가 커버리면 맘카페도 더 이상 적합한 곳이 아니게 되니까. 그렇게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여성들은 물리적, 정치적 활동 반경이 점점 좁아진다. 남성들에게는 성인이 된 다음부터 은퇴할 때 까지 사회 곳곳이 떠들고 자기 주장할 장소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유퀴즈가 요즘과 달리 야외에서 일반 시민들을 만나며 인터뷰하고 퀴즈 풀던 시절. 본방으로 연희동 샤넬미용실 편을 봤던 기억이 있다. 유퀴즈 레전드 에피소드 중 하나로 꼽히는 그 방송. 뽀글 파마를 말던 할머니들과 유쾌한 사장님이 인상적이었지... 내용은 사실 할머니들이 툭툭 던지는 몇 마디에 엠씨 둘이 자지러지게 웃다가 끝난 게 다 이긴 한데. 나는 그 공간이 화면에 담긴 것 자체가 반가웠다. 그 안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것이 많을까, 얼마나 솔직했을까, 얼마나 거침없었을까 상상할 수 있어서. 
 
그리고 역시 사람 사는 건 세상 어딜 가나 비슷한가 보다. '동네 미용실에서 떠드는 여자들'에 주목한 단편 다큐멘터리가 있다. 찾아보니 한국에서 24시간 비행해야 갈 수 있다는 튀니지가 배경인.
 

 
Ain't no time for women (2020)
(원제: Y'a pas d'heure pour les femmes)
감독: Sarra El Abed
 
요약하자면, 2019년 튀니지 대통령 선거일 전후로 한 동네 미용실에서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의 관찰 기록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인상깊게 본 이유는 공간과 시간(타임프레임)의 제약이 흥미로웠기 때문인데, 카메라에는 오직 미용실 내부만 비춘다. 선거일 전날, 당일, 그다음 날. 대략 2-3일만이 담겼다. 한국 방송으로 따지면 다큐 3일 느낌이다. 이 제약 때문에 이야기는 불필요한 곁가지 없이 대선 후보들을 두고 평범한 튀니지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감독은 그저 관찰할 뿐이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후보에 대한 선호와 인식 차이도 느껴지고, 튀니지 여성 인권 발전 문제와 종교적 보수주의 사이의 긴장감도 읽을 수 있다.
 

 
화면과 사운드 연출도 내용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대선 관련 라디오 뉴스 리포트 음성으로 시작해 미용실 내부 현장음으로 이어지는 도입부는 이야기의 시공간과 사회적 배경을 설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의미를 유추해 보는 재미도 있다. 예를 들면, 손님들의 색색깔의 의상과 오프닝에 등장하는 색이 입혀진 화면들은 아무래도 여성들의 다양한 의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고. 도장이 뭍은 손가락은 그녀들의 의사표현의 상징이 된다든지. 다양한 의견이 거침없이 오고 가는 역동적인 분위기는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픽션 드라마, 영화처럼 이야기는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감독이 애정을 갖고 지켜본 뒤에 '발견된' 이야기들이 더 빛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큐멘터리의 매력이 여기에 있지 않나. 
미용실뿐만 아니라 더 많은 곳에서 여성들이 사회를, 남성중심의 정치를, 남자들이 떠드는 여성의제를 가감 없이 꼬집고 비틀며 여자들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잘 기록되었으면 하고. 
 
 
 
The New Yorker 유튜브 채널에서 시청 가능.
https://youtu.be/cu_08-7uuJo?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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