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딱 1개월. 서울 떠나 맨체스터 온 지 딱 30일.
지난 4주간 내 생활은 꽤 단순했다. 소비, 탐색, 그리고 집중. 내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생존’하려면 해야 했던 것들.
1. 소비
나 한 몸 먹고 자고 싸고 노는 데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했던가? 맨체스터 공항에 입국도장 찍고 나서는 순간부터 대략 열흘 동안 내가 180만 원 정도를 썼다는 게 나는 무지 충격적이었다. 사치품을 하나라도 샀다면 내가 놀라버린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 파운드가 수중에서 사라졌을 테다. 하지만 내 소비 내역의 카테고리는 의류/주방용품/화장실용품/문구류/식재료/기타잡화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보통은 한번 사면 끝, 추가 구매가 필요 없는(비누받침대, 반찬통, 시계, 옷장수납정리함 등) 것들도 포함. 그러니까 ‘초기 정착비’로 나갈 수밖에 없는 지출, 나름 아껴서 알차게 사라진 돈이라는 거. 인천공항에서 허용수하물보다 4킬로 넘었다고 삼십몇 만 원 내야 했던 것 안 내고 정말 최소한만 가져온 짐이라 현지에서 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는 것도 고려해서. 놀란 새가슴을 그렇게 다독였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모든 게 집에 일단 다 있는데다가 다 떨어진 생활용품들을 사서 채워 넣는 건 엄마 몫이었다. 그리고 나의 카드결제대금은 보통 회사 출퇴근 교통비, 핸드폰 요금, 스포티파이 구독료, 필라테스랑 영어회화 무이자 3개월, 복이 밥이랑 모래값, 도서비, 친구들 만나 먹고 노는 데 썼던 돈들 정도로 이뤄져 있었지. 독립-자취해서 살림까지 했으면 나의 세후 월급(혹은 카드값 후 월급)은 나를 먹여살리기에 절대 결코 충분하지 않았음을 이렇게… 깨달았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았던 게 아니라 운이 좋았거나 아무것도 모르고 나이만 먹었던 것이다.
덧붙여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아니라 ‘고물가의 나라’라는 점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피시앤칩스‘밖에 없냐고 놀릴 게 아니라 ’그걸 그 돈을 주고 먹어야 하냐‘며 나는 뭐 먹고살지 걱정해야 했다는 것도 얘기해야지. 조금 다르게 말하면 회사를 일찍 그만두지 말고, 떠나오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많이 악착같이 벌었어야 한다는 것을 외식비와 교통비에서 체감했다. 서울에서 밤에 야근택시 타고 집에 올 때 2만 5천 원 정도 나왔고 오래 걸리면 5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맨체스터 공항에서 우버 타고 기숙사까지 20분이었는데 25파운드, 1650 곱해서 4만 원 조금 넘었다. 내가 맨체스터 시티 센터까지 이것저것 구매하러 일주일에 몇 번을 나갈지 몰라 정기권을 못 샀고 컨택트리스 결제가 약간 더 절약할 수 있는 방법임을 몰랐을 때는 일주일 동안 탔던 트램과 버스 비용이 37파운드=6만 원이었다. 야… 나 정말 무서우다. 식당에서 일본라멘 한번 사 먹었더니 2만 원 나오고요. 야… 나 어떤 생활노선을 타야 되냐 그동안 서울서 벌어 온 돈 아껴서 잘 쓰려면?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유학 결심 및 준비를 병행하지 못했을 것 같지만, 그랬어야 했나 싶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칼퇴사 했을 거면서도, 후회 한번 해보는 거다.
2. 탐색
평소에 남한테 관심이 없다고 남들이 말해주는 편이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선 아닌 척하면서 시선을, 귀를 쫑긋, 몸의 방향을 살포시 돌리고 지냈다. 모든 건 영어 때문. 단 며칠, 혹은 1개월 이내의 단기 여행객으로 다닐 땐 내 관심은 오로지 나의 목적지,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내가 주문한 음식이 기대한 것대로 나올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였던 것 같다. 이게 해결되면 풍경도 보고 사람 구경도 했고. 그런데 여기서 내 생활을 꾸리고 학교 수업을 듣고 따라가고 배운 만큼 성장해야 하는 유학생이 되니까 수집해야 하는 정보의 종류와 양이 압도적으로 다양하고 많아졌다. 잠깐 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던 때는 뭐 몇 개 좀 놓쳐도 괜찮았는데 말야. 그런데 지금은 그랬다간 마치 크거나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겪을 것만 같다는 불안 속에서 지내느라고- 더 정확히 말하면 바보 되는 게 싫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려오는 영어, 읽어야 하는 영어에 완전 몰두. 하… 그래서 요새 진짜 세상 피곤하다.
맨체스터가 어떤 곳인지도 살펴봤다. ‘그레이터 맨체스터’ 답게 이곳을 아우르는 동네가 워낙 많으니, 머무는 동안 슬슬 여기저기 더 다녀봐야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인상을 갖게 되겠지만 뚜벅이로 걷고 트램과 버스를 타고 다니며 관찰한 맨체스터 중심부의 모습은 조금 심심했다. ‘심심’하다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네온사인이 없고 싸인보드가 다양한 형태가 아니라서 생긴 인상 같고.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나 돔과 신전 형태의 건물들이 풍기는 ‘유럽 스러운’ 이미지도 있지만 그를 둘러싸는 지역은 여의도 빌딩숲처럼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여기저기 개발이 이뤄져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 느낌도 좀 있었다. 서울이랑 면적 비교는 안 해봤지만 종로만 나가도 미술관과 카페가 즐비했던 것에 익숙했던 나는, 이곳의 약간의 듬성듬성함에 아직 적응을 덜한 상태 같다. 1년도 넘게 여기서 지낼 건데 뭐 급하겠나. 카페에서 맛있는 핫초코랑 빵 사 먹으며 시간 보내는 것과 동네서점 구경을 아직 안 해봤으니까, 그때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테다.
사람. 많다. 서울이랑 다르게 많다. 누구를 ‘이민자’라고 분류할 수 있을지와 ‘영국인’을 이루는 인종이 얼마나 다양한지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단순하게 피부색으로 나누면 체감상 백인 절반에 비백인 절반이다. 머리색, 체형, 쓰는 언어, 옷 스타일, 하는 행동도 모두 천차만별. 전에 어디선가 한국 여자가 해외에 나와 살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솔직히 좀 알 것도 같은게- ‘여성’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양하다. 더 친밀하고 좁은 관계에서는 그런 여러 여성을 두고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어떤 말과 평가를 주고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길거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 또는 스스로가 보여지길 원하는 이미지로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이 증명하는 것들이 꽤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나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이미지이기도 하다는 생각 정도까지 해봤다.
3. 집중
다르게 말하면 한정된 에너지의 쓸데없는 분산을 막았달까.
기숙사 살림, 통신, 은행, 학교 등록 등의 할 일을 처리하는 데 첫 열흘을 완전히 할애했다. 눈 뜨고 오늘 해야 할 일(주로 사야 할 것, 가입해야 할 것) 정리하고 하나씩 하고 나면 잘 시간 됨.
그리고 시작된 영어 코스. 늘 목표는 5시 기상 미라클모닝이었지만 항상 6시 반이나 7시에 일어나서 아침 챙겨 먹고, 비타민이랑 유산균 먹고, 점심 도시락(늘 같은 샌드위치를 만듦) 싸고, 8시 50분에 방을 나섰다. 20분 걸어서 학교 가거나 학생증 보여주고 무료 버스 타거나. 9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 영어 수업 듣고 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 매일 밤 10시? 정도까지 단어랑 표현 리뷰, 읽기 듣기 에세이 과제, 매주 금요일 프레젠테이션 준비, 팟캐스트 듣기, 인스타그램에 떠오르는 영어 표현 관련 게시물들 보기를 저녁밥도 해 먹고 설거지도 하면서 하는 거다. 야 쓰고 나니까 그냥 수험생이네 고3 야자도 이렇게 집중해서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근데 왜 입은 안 떨어지는데 입을 안 달고 온 거냐고. 아무튼 그렇게 하루가 정말 빠르게 뜨고 졌다. 으어… 아침이야. 으어… 해 떨어졌어 아홉 시 넘어서. 으어… 아침이야. 으어… 으어… 혹시 나 영국에 사는 게 아니고 학교랑 기숙사에 사는 건가.
그래도 나름 주말에는 홀로 퍼져있거나 또는 친구를 만나서 잘 놀고 먹었는데, 그마저도 굉장히 루틴한 일과.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 오전에는 방 청소. 청소기가 없어서 이케아에서 사온 손바닥만한 빗자루와 쓰레받기 세트로 일일이 자루자루 빗자루질. 이게 다 내가 만든 먼지가 맞는가. 내가 긴머리였다면 얼마나 더 많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수북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한주동안 모인 빨래도 이때. 빨래 한번 하려면 1층까지 총 네 번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진짜 세상 귀찮지만, 할일을 빨래 돌아가는 데 45분, 건조기 끝나는 데에 1시간이라는 시간 제한 내에 해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기에는 꽤 괜찮았다. 밥 해먹기든 씻고 나갈 준비하기든 학교 과제 하나 끝내기든 속도감 있게 마무리 할 수 있음.
이곳에서 나를 구하는 것은 나의 부지런함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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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이렇게 눈 깜짝할 새에 보내고 나니까 드는 생각: 학교 일 년 정말 금방이겠구나.
이에 동시에 밀려드는 두 가지: 매일을 밀도 있게 지내야 후회가 없겠다, 그 사이에 나는 얼마나 이룰 수 있을까. 불안인지 결심인지 기대인지 모를 것들이 스멀스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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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로그 하겠다고 쫌쫌따리 찍었는데 대략 6개월 전에 프리미어를 지워버려서 편집을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야 그냥 막 찍어 뭘 공을 들여 하면서 찍어둔 클립들을 보고 있자니 야 이게 뭐냐 이걸 하나로 어떻게 묶냐 싶고. 그니까 브이로그고 뭐고 사람이 가벼운 마음을 갖기가 진짜 어려우다. 어려우어… 팔자다 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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