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석사 유학 마지막 학기 기록.
매 학기마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이 조금씩 달랐는데, 이번에는 욕심과 현실, 불안과 불확실성이 그것이었다.
욕심과 현실: 잘 만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려웠다.
15분-20분 사이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최종 과제. 졸업작품 개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왜냐면 졸업과 동시에 나의 관심사, 나의 사람 혹은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회사에 속하면 고객의 것을, 대중이 원하는 것을, 상사가 원하는 것을 만들게 되니까 말이다. 주제와 소재를 찾는 것은 쉬웠다, 유학 떠나오기 전부터 오래도록 혼자 고민하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하고, 우리 엄마 얘기. 사실은 내 나이 또래 여자들의, 그리고 그녀들의 엄마들이 공유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촬영을 위해서 서울에 다녀왔다. 날짜를 정확히 세어보니 한 달 꽉 채웠던 일정. 교수님께 주제와 스토리라인을 컨펌 받은 뒤에 서울로 가서 기획을 마무리 짓고, 촬영 2주, 가편집 2주와 동시에 추가 촬영. 연일 30도를 우습게 뛰어 넘는 서울 날씨 속에 하루 종일 야외에서 촬영하고 있으려니 죽을맛이었다. 개인 프로젝트인데다 한국에 와서 촬영하니 과 동기들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일을 하니 또 그렇고, 결국 고민도 문제해결도 홀로 해야 해서 나중에는 외롭기까지.
나의 이야기를 접할 첫 시청자가 영국인들이라는 점에서, 나는 외국인 제작자로서, 외국어로,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지리적으로 멀고, 문화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 온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또한 고민해야 했다. 덕분에 학부 때 배우고 넘어갔던 영상문법도 다시 들춰보고, 경험으로 쌓은 ‘감’에도 근거를 찾느라 시간 좀 쓰고. 여러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이미지의 원형, 모티프, 상징, 그리고 눈으로 감각할 수 있는 감정들을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게 하는 방법을 찾는 시간이었다. 근데 어렵긴 어렵더라, 한국인에게만 보여줄 것이었다면 고려하지 않았을 부분들 - 한영 번역 자막이나 지리적인 배경 설명 등 - 을 촬영부터 편집 과정 내내 신경쓰려니까 이것 참.
이번에 확실히 한 것은, 진실은 한 가지 모양으로 존재하는 상태나 사실이 아니고 다양한 방향에서 다르게 발견되고 여러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논픽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마치 그 어떤 것도 임의적으로 가공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담을 주지만, 사실은 다큐멘터리도 뉴스 리포트가 아닌 ‘스토리텔링’의 한 종류니까.
불안과 불확실성: 사실 모든 우울은 여기서 시작돼…
9월이면 학교 과정이 끝난다. 기숙사 계약도 끝이니 짐을 뺴야 한다. 짐을 뺴서 어디로 간다? 한국으로 돌아가? 영국에 더 살아?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한국으로 돌아가? 영국에 산다면 지역은 어디? 맨체스터에 계속? 런던으로? 그 외에 도시로? 영국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여기서도 제작사에 들어가서 일하나? 내가 해외에서 구직활동하고 일 할 용기가 있나? 내가 그럴만한 영어 실력이 되나? 돈 벌기 전에 집부터 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럴 돈은 있나? 여유자금이 얼마나 있지? 한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거지? 가족이랑 더 떨어져 지내도 괜찮나? 한국에서 살아갈 일상과 인생과 영국서 1-2년 더 지내며 살게 될 날들 중 무엇이 더 낫지? 무엇을 기준으로 낫다 아니다 평가를 할 수 있지? …. 이런 고민을 학기 내내 했다는 애기다. 괴로워….
사실 간단한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졌을 땐. 내가 바라는 것? 굉장히 추상적인 얘기지만 나는 그저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고집불통에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경험과 내공으로, 늘 나를 괴롭히는 불안과 불확실함에 조금씩 더 현명하게 맞설 줄 아는 사람으로 나이들고 싶다. 단시간에 압축적으로 그걸 가능케 하는 환경이 어딜까? 모든 게 편안한 한국보다는 영국이겠구나.
게다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늘상 해줬던 ‘나중에, 과거에 하지 않았던 일 떄문에 후회하지 말라’는 말과 서울서 엄마가 던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가 마음에 콕 박혔다. 그래, 인생 길고. 졸업비자 받아서 2년 더 살아보자, 적어도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는 내가 더 고생스럽겠지만 그만큼 얻어가는 게 있을 테니까.
오늘 마지막 학기 평가가 나왔다.
헤헤. 고생했다 나자신!
잘 쉬고 재충전해서 나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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