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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bby is free

Edinburgh, Fringe and Me!

by solim 2023. 9. 1.

 
 
남들 공부하고 일할 때 노는 게, 역시나, 제일이다. 
예상치 못했던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올해 초 집에 틀어박혀서 영어(시험) 공부만 했던 암울한 나날이 이렇게 빛을 보는구먼.
 
 
목적지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맨체스터에서 기차 타고 세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영국 온 지 한 달 만에 체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이 여행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은가 고민을 잠깐 했으나 기차표 환불이 안되는지라, 못 먹어도 고. 
 

2019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단위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리고 한 달 동안 수백여 개의 크고 작은 공연이 온 도시를 채우는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는! 그렇다, 돈이 없어서 늘 비수기에만 여행하는 내가, 축제 막바지에 남은 숙소라고는 1박에 15만 원이 넘는 6인용 도미토리 호스텔뿐인 극성수기에 이곳에 굳이 온 이유는 오로지 프린지 페스티벌 때문이었다고... 이번엔 어떤 걸 봐야 할지 기사도 찾아 읽어보고 리뷰도 꼼꼼히 읽고 예매까지 하고 왔다고요 홍홍홍.
    
 
 
 
After all

After all, who's going to cry for my ending?

 
인상 깊게 읽은 책: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
인상 깊게 본 다큐: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인상 깊게 본 무용+극: after all (new!)
 
잘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잘 살아 생활하는 것만큼이나 잘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길 바라고 이별은 늦게 찾아오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그 사람을 시간에 쫓기듯이 허망하고 허무하게 보내버려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 장례식에는 부디 육개장과 수많은 일회용 집기, 상조 회사에서 빌려주는 상복, 멋이나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근조화환, 사진 슬라이드에 음악 깔아 만든 영상이 줄곧 나오는 티비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싫다. 관짝에서도 10명 이상의 사람은 부담스럽다. 죽으면 장례'식' 없이 바로 빠르게 화장되면 좋겠다. 맞다 제 장기가 쓸만하다면 가져가시고요. 등록해 놨으니까요. 나의 마지막이 끝난 다음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했던- 정말 별 것 아닌데도 웃겼거나 예상하지 못했지만 감동적이었거나 너무나도 일상적인 순간이었지만 이게 행복인가?를 느낄 만큼 충만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바란다. 내가 평생 써 온 일기는 제발 읽지 말아 주고요. 
 
그렇담 나는 앞으로 언젠가는 다가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에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이미 보내버린 사람들은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놓아주었는지? 둘 다 대답은 '아니오'다. 공연을 보면서 나를 가장 울린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아이고... 할머니 보고 싶다고 남의 나라 땅에서 퐁퐁퐁 울어재낀 손녀딸이 여기 있습니돠.
 
 
 
 
Papillon

한 시간 내내 비트에 몸을 쪼갤 수 있는 사람, 본인 표정과 몸짓으로 음악을 끌고 가는 사람, 밖에서 전쟁 나도 계속 춤출 것처럼 집중한 사람, 그 사이사이 그 순간이 너무나도 충만(?)한 지 미소 짓는 사람들의 조합. <Papillon>을 보는 내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그렇게 깨달았다. 나에게 덕통사고가 찾아오는 순간, 어떤 것들이 나의 덕력을 정조준하는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음 + 그 일에 완전히 몰입함 + 그 사실이 대상의 표정, 행동, 풍기는 분위기로 뿜어져 나오는 순간에 내가 그곳에 있음.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내가 이런 사람들을 동경한다는 사실. 봐봐 진로 고민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아.
 
 
 
 
Dances like a bomb
 
사람의 일상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멋'이 없다. 별 거 없다. 몸을 일으키고, 걷고, 먹고, 싸고, 싸우고, 울고, 좀 웃고, 앉아서 매일 하는 일을 반복하고, 씻고, 눕는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행위를 하는 사이 시간이 무섭게 흘러서, 사람은 금방 늙어버리기까지 해. (이 사실을 어느 순간 한번 인지하기 시작하면 사는 게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슬퍼짐) 이 밋밋한 매일과 인생이 풍성해지는 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다. 
 

리뷰는 읽다 말았고 사실 순전히 포스터에 끌려서 보러 갔던 것이다

두 배우가 속옷 차림으로 입장하는 관객을 맞이하는 극의 시작부터 원피스, 바지와 셔츠가 온통 땀에 젖은 채로 끝나는 공연의 마지막까지, 나는 이 공연을 '관계'로 느꼈고 해석했다. 끈질기기도 질척이기도 하는 움직임으로 꼭 붙어서 움직일 때, 무대 양 끝에 떨어져 앉아 각자의 연기를 할 때, 멀었다 가까웠다 거리를 조절하며 무대를 휘저을 때, 한 명은 무대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수풀 배경에 몸의 절반이 가려진 채 누워있을 때. 사람과 사람 간의 다양한 관계가 그려졌다. 그리고 물리적 거리에 관계없이 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서로 관계하고 있어서 더 살아 있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계속 슬퍼 보였다는 것이다. 
 
 
 
 
Anna Vanosi Jazz Trio

언니 내가 이름을 못 외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 거의 겨울왕국 엘사마냥 시원시원하게 노래해서 사랑에 빠질 뻔 했다고요

재즈 라이브 공연을 즐겨보고 싶은데 나에게 찾아온 (이번에도 역시나 쓸데없는) 고민은 꽤 다양했는데.
술을 안 마시는데 라이브 재즈 바에 가도 괜찮을까: 당최 뭐가 괜찮고 안 괜찮다는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염려함.
혼자 가는데 뻘쭘하지 않을까: 여행도 영화관람도 식사도 콘서트도 혼자 잘 가면서 대체 왜 망설였는지 이 또한 알 수 없음.
음악이 취향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 재즈 중에서도 이런 쪽은 내 취향이 아니구나 알게 되는 거고, 더 듣기 싫으면 나오면 되지 누가 못 나오게 감금하겠냐.
 
무대가 더 훤히 잘 보이는 자리를 사수하지 못했다는 점과 물을 가져가지 않아 목이 말랐다는 것 외에는 불편할 것도 불만스러운 것도 없었다. 재즈의 참맛까지 알았다고 할 건 못 되지만 라이브 재즈 입문자에게는 아주 적절한 수준이었다. 시원시원하게 쭉쭉 뻗어 나오는 성량에 중저음 부드러운 음색, 반짝이는 초록색 드레스, 쿠션감이 엄청나 보이는 머리숱(...)까지 편안하게 즐겼어요 땡큐.
 
그리고 영국 날씨 돌려까며 웃기는 이야기를 영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낀 공연이기도..
stormy weather ~ 오오~~
 
 
 
 
I do it because I love it.

아이구 총각 노래 참 잘 들었어요 기타 연주를 보면서 드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하루
영국 와서 사람 제일 많이 본 것 같다

 
단순하고 단단하며 명쾌한 이유로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좋~아~보~여~
 
 
 
 
Grayson Perry <Smash hits>

온 기둥을 랩핑하고 있는데도 이 전시를 보러 갈 생각은 아니었던거야...
디테일로 꽉 찬 캔버스에 유일하게 여유있게 비어있는 부분: a sense of self

사실 이 전시하는 줄도 몰랐고 당연히 유료인 것도 몰랐다. 스코티시 내셔널 갤러리 구경 갔는데 안내 직원이 이거 보러 왔냐고 물어보더라고. 뭐.. 뭐든 거기서 하는 거 보러 왔으니까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무료 상설 전시를 놔두고 유료 전시를 보게 되었는데... 우연과 약간의 떠밀림에 얻은 행운이었던 건에 대하여!


엄청난 양과 깊이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본인의 생각을 더해 내용을 흥미롭게 조직하고 구성한 다음에, 자신만의 최선의 방법으로 이미지화하려고 공들인 작가의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훤히 잘 보이는 경우가 있다. Grayson perry가 그랬다. 내 마음대로 이름 붙이기로는 '마인드 맵의 달인'. 아직 학기 시작도 안 했는데 졸업작품 주제를 뭘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으로서(ㅎㅎㅎ) 작가가 평소에 얼마나 읽고 보고 쓰는지, 메모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작품마다 상당히 다양하고 많은 정치적 이슈들을 툭툭, 이름만 나열하듯 던져놓은 것 같지만 본인 주관은 묘사, 색, 배치 등 여러 방식을 사용해서 표현해 둔 점도 흥미로웠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고 선택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반대로 침묵, 방조, 방관, 무시, 그리고 무지 같은 개인의 일상적인 행동도 모두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이고... 나도 잘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나다운 걸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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