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끝!
이사 후 적응 끝!
앞으로 정해진 것이 없어 방황 시작!
정병 시작?
상황이 이러한지라 환기가 필요했다. 영국에 있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는 여행지가 어디일까 고민했다. 찾아보니 가는 데 두 시간 반 걸리며 저가항공사 이용이 가능한 매력적인 곳이! 시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자극을 충전하고 싶어서 오랜 시간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던 아이슬란드 여행을 해보기로 결심.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로라를 보지 못했어도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일주일이었다. 강렬한 인상의 자연, 관광객이라서 누리는 단순하지만 건강한 하루 일과, 그리고 가장 예상치 못했던 맛있는 음식의 콜라보 덕분에. (본질을 말하자면 금융치료일지도…)
케플라비크 공항에 도착했을 때 첫인상은 ‘아무도 바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슬란드에 오는 모든 외국인 관광객이 이 공항을 거치는데도 입국심사대를 지난 순간부터 어찌나 한적한지. 10월-12월은 오로라 관측이 잘 되어 붐비는 시즌 이랬는데. 역시, 쉽게 훌쩍 떠나올 수 있는 여행지가 아닌 건 분명하구나 싶었다. 레이캬비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깨끗하게 새파랗고 공기는 딱 초겨울의 그 차가움이라, ‘싹 비워내고 신선함을 채우기 좋은 곳이군’ 속으로 생각했다.
레이캬비크를 돌아다닌 건 도착한 날 반일과 투어가 없었던 이틀.
물론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와 레인보우 스트릿의 각종 상점들과 미술관, 박물관도 구경.
그 외에 좋았던 몇 가지 기록
레이캬비크 항구 산책
원래 계획은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는 것. 바뀐 계획은 날씨가 좋으니 밖을 돌아다니자. 숙소에서부터 이곳저곳 가게 구경도 하면서 걸어갔더니 40분-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큰 배들이 정박해 있고, 주변엔 냉동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만 줄지어 늘어선 곳. 여길 왜 가나… 싶으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고 가자 해서 계속 걸었다.
작은 인공 언덕을 만들고 위에 설치미술..? 같은 걸 해 놓은 장소. 올라가면 조금 낮게 뜬 드론이 되어 레이캬비크 시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집에 영상 통화를 걸어서 가족에게 여행 브리핑을 하는 시간으로 썼다. 물멍도 때리고 노래도 듣고. 문득 구글맵을 켜서 내가 어디 있다고 나오는지 확인해 봤는데, 아이슬란드 지도 위에 파란 점의 내가 존재하는 게 좀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왔지? 어쩌다 집 떠나 살고 있지? 어쩌다 지금까지 이런 선택들을 해 왔지?
왜 많고 맛있는지 모르겠는 레이캬비크의 음식
아이슬란드 여행 얘기에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높은 물가’인데, 내가 이 물가와 내 작고 소중한 지갑 사정 걱정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여행하기 위해 택한 방법: 적어도 누군가의 서비스가 들어간 것일 때에는 ‘그 값을 한다’고 생각하기. 식당에서 요리해서 나온 음식 같은 것. 그리고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나의 억지 정신승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레이캬비크에서 사 먹은 음식들… 다… 맛있었고, 양이 많았다. 맛있는 데 양이 많았다는 게 한 끼 사 먹을 때마다 3-6만 원 출혈이 생겨도 만족스러웠던 배경. (주의: 영국에서 지내던 사람임)
여행 마지막 날, 친구 줄 기념품 하나랑 내가 읽을 책이랑 장식품 하나를 사려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발견한 디저트 카페! 처음에 디저트 하나 시켰다가 10초 만에 다 먹고, 카운터에 다시 가서 괜한 변명 “오늘이 아이슬란드 마지막이라, 나한테 다음은 없어요.. 맛있어 보이는 건 다 먹고 가야 해요” 덧붙이면서 다른 맛 추가해 먹었던 곳. 왠지 아이슬란드를 떠나면 여행기를 금방 안 쓰고 방치할 것 같아서 배부르게 먹으면서 일기 여섯 장 쓰고 왔다. 사실 이 블로그도 그날 쓴 일기 다시 들춰보며 적는 중...
레이캬비크 밤의 콘서트
나의 여행 루틴… 이라고 하니까 좀 거창한데, 가능하면 꼭 하려고 하는 것 중 하나는 그 나라나 도시를 대표하는 공연장에서 공연 관람하기다. LA에서는 월트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보고, 파리에서는 보고. 찾아보니 아이슬란드는 Harpa. 그리고 Iceland Symphony Orchestra.
전에 아이슬란드 음악/음악인/오케스트라가 주목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관심이 생겼었는데, Laufey가 이 오케스트라와 라이브 공연을 했던 앨범을 들으면서는 문득, 젊고 열려있는 오케스트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클래식 음악 전문 지식 전무함 그냥 마치 그럴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임) 내가 머무는 기간 중에 공연이 있나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확인해 봤는데- 구름 때문에 못 본 오로라의 선물인가?! Mozart og Schumann - Sinfóníuhljómsveit Íslands 공연이 떡하니! 투어 다녀와서 바로 볼 수 있는 시간!
라이브 음악을 듣는 게 좋고 악기를 자기 몸 처럼 다루는 몰입한 연주자들을 보는 게 흥미로워서 콘서트를 보러 가는 것인데, 이번에도 지휘자는 리듬과 강세와 분위기를 온몸으로 가지고 놀았고 연주자들은 그 많은 음들 중에서 자신의 것들, 자신의 타이밍과 자리를 딱딱 찾아갔다. 보는 내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직업이 단순한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직업과 닮은 인생을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레이캬비크.
이곳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많겠지만 내게 레이캬비크는 ‘더 속속들이 알아보고 싶은 작지만 꽉 찬 도시’다.
물리적으로 작았다. 레이캬비크를 돌아다닐 때 버스를 탄 적이 없다. 레이캬비크 패스 같은 거 사지 않아도 되겠던데…? 물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외곽에서 살면서 출퇴근하기도 하겠지만은. 숙소에서 가고 싶은 곳을 지도에 찍어보면 제일 먼 곳이 도보 30분이었다. 다 걸어서 다녔다.
꽉 차 있었다. 기본적으로 다운타운에 관광객으로서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다 있다는 얘기인데, 내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작아도 있을 게 다 있군’ 했던 것은 방탈출 카페와 영화제작사(혹은 학교?로 추정되는)를 발견했을 때다. 특히 영화 어쩌고 사무실은 아침 8시에 꽤 많은 인원이 모여서 회의하는 게 창밖으로 보이더라고. 낯선 관광객 눈에는 상업용인지 주거용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네모반듯한 건물들인데,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살펴보면 법률 사무실 같은 곳도 보이고 미용실도 영화관도 관공서도 보이고 그랬다. 방송 카메라맨이랑 기자가 차에서 내리는 (내 눈에는 그냥 아저씨) 인물에게 들러붙는 것도 구경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레이캬비크 어딜 가도 보이는 할그림스키르캬 교회로 관이 들어가는 모습도 스윽 지나쳤다.
볼 것 다 본 것 같으면서도 ‘더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은 레이캬비크’인 이유는 사실, 어째서 아이슬란드의 여성 인권이 (그나마)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슬란드에 대해 언제 처음 알게 됐지? 정확한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들었던 ‘아이슬란드는 지구 안의 다른 행성’ 같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고, 노래가 좋았던 밴드가 아이슬란드 베이스였고,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이 아이슬란드였다. 그 이후에 아이슬란드에서 이뤄진 24시간 여성 총파업에 대해 알게 됐다. 남녀 임금 격차가 작다는 정보도 접했다. 배경이 이러한지라, 레이캬비크를 돌아다닐 때 내 관심은 자꾸만 눈앞의 집과 사무실 안의 풍경이 어떨지로 향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구상에서 가장 나아간 상태라는 사회에서 사는 여성들의 하루는, 직장생활은, 가정생활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궁금증. 더불어, 시기에 따라 굉장히 극단적인 자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 가치관은 무엇일지, 일상의 재미는 어디서 찾는지도 관찰해보고 싶었다. 그에 비해 내게 주어진 일주일은 아이슬란드 현지 친구를 만들고 이 사회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아쉬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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